AI 때문에 노조에서 전화가 온다 — 질문의 무게를 온전히 받아들이기
원문: Facebook 포스트 (2026-03-12) 저자: 김상균 (인지과학자 경희대 교수 SF작가 컨설턴트) 분석 보강: 카를로타 페레즈(Carlota Perez) 기술혁명 이론, Morgan Stanley AI 노동시장 분석(2025), S&P Global 연구(2025), World Economic Forum 데이터
서문 — 전화 한 통이 담고 있는 것
요즘 노사협의체와 노동조합으로부터 연락이 늘었다고 한다. 질문은 단 하나다. “AI 도입을 앞두고 있는데, 우리가 뭘 준비해야 할까요?” 이 질문을 받을 때마다 두 가지 감정이 동시에 올라온다고 한다. 반가움과 걱정. 이 감정의 긴장 속에 오늘 AI 시대 노동 문제의 핵심이 모두 들어 있다.
반가운 이유는 명확하다. 막연한 두려움에 머물지 않고 “준비해야겠다”는 방향으로 고개를 드는 것 자체가 신호이기 때문이다. 많은 조직에서 AI를 화제로 꺼내는 것조차 불편해하거나 기피하는 상황에서, 노사가 함께 테이블에 앉겠다는 의지는 분명히 진전이다. 그러나 걱정도 크다. 이 질문이 생각보다 훨씬 크고 복잡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대화를 나눠보면 하나의 공통점이 드러난다. AI 도입 자체는 노동자들도 심하게 반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러면 서로 뭘 논의해야 하는가?”로 들어가는 순간, 테이블 위에 올릴 아젠다가 없다. 무엇을 협의해야 할지 모르는 상태에서 협의를 시작하려는 것이다.
이 글은 그 질문의 무게를 온전히 받아들이고, 왜 이 문제가 이렇게 크고 복잡한지를 체계적으로 풀어보려는 시도다.
1. 질문의 틀부터 바꿔야 한다
AI와 노동의 관계를 논할 때 가장 흔하게 빠지는 함정은 “AI가 내 일자리를 빼앗느냐?”라는 질문에 갇히는 것이다. 이 질문은 틀렸다기보다 불완전하다. 더 정확한 분석 축은 두 개의 차원으로 나뉜다.
첫 번째 축은 시간이다. 지금 당장 영향을 받는 현재의 문제와, 기술이 더 성숙해진 이후 나타날 미래의 문제를 구분해야 한다. 두 번째 축은 가치 판단이다. AI가 기술적으로 대체할 수 있는 영역과, 기술 수준과 무관하게 인간이 붙들어야 하는 영역, 즉 AI가 대체하면 안 되는 영역을 구분해야 한다.
이 두 축의 교차점에서야 비로소 협의 가능한 아젠다가 만들어진다. 노사는 ‘대체할 수 있는 것’을 놓고 시간과 순서에 따라 양측의 고통을 덜어낼 포인트와 준비의 우선순위를 찾아야 한다. 그리고 동시에 ‘대체하면 안 되는 것’에 대한 깊은 논의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현재 이 작업을 진지하게 수행하는 조직은 거의 없다. 대부분의 노사 논의는 전자, 즉 어떤 직무가 언제 자동화될 것인가라는 기술적 사실 확인에 그치고, 후자의 가치 논의는 시작조차 못한다.
World Economic Forum의 2025년 미래 직업 보고서에 따르면 향후 5년간 전 세계에서 약 8,500만 개의 일자리가 자동화로 대체될 것으로 예측하는 반면, 동시에 9,700만 개의 새로운 역할이 생겨날 것으로 보고 있다. 이 숫자 뒤에 있는 진짜 질문은 사라지는 일자리와 생겨나는 일자리 사이의 간극을 누가, 어떻게, 얼마의 비용으로 메울 것인가이다. 그리고 그 답은 테이블 위에 올바른 아젠다가 있을 때만 나올 수 있다.
2. 지금의 혼란은 압축된 전개기 때문이다 — 카를로타 페레즈의 렌즈
경제사에는 기술 혁명이 두 단계를 거친다는 강력한 이론이 있다. 베네수엘라 출신 경제학자 카를로타 페레즈(Carlota Perez)가 그의 저서 『기술혁명과 금융자본』(2002)에서 정립한 이론이다. 페레즈는 지난 250년간의 다섯 차례 기술 혁명을 분석해 동일한 패턴을 발견했다.
첫 번째는 설치 국면(Installation Phase)이다. 새로운 기술이 등장하며 혼란과 실험이 폭발한다. 스타트업이 우후죽순 생기고, 투기 자본이 몰리며, 기존 산업 질서가 흔들린다. 그리고 이 국면의 후반부에는 거의 예외 없이 양극화, 포퓰리즘, 기존 제도의 붕괴가 수반된다. 두 번째는 전개 국면(Deployment Phase)이다. 충분한 시간이 지나면 새로운 경제 질서와 법, 산업 생태계가 자리를 잡으며 혼란이 수습된다. 페레즈는 이 단계를 ‘황금기(Golden Age)’라 불렀다.
산업혁명 때는 이 두 단계가 각각 수십 년씩 걸렸다. 철도 혁명도 마찬가지였고, 전기·자동차·인터넷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LLM(Large Language Model)은 불과 3년 만에 사회 전반을 뒤흔들고 있다. ChatGPT가 등장한 2022년 말부터 지금까지 불과 3년 남짓한 시간 동안 기업 운영 방식, 콘텐츠 생산, 코딩, 고객 서비스, 심지어 의료와 법률 영역까지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속도만이 문제가 아니다. 더 큰 문제가 있다. 국가마다, 산업마다, 심지어 기업마다 지금 어느 단계에 있는지가 다 다르다는 것이다. 어떤 글로벌 빅테크 기업은 이미 AI를 핵심 생산 도구로 안착시키며 전개 국면으로 진입하고 있는 반면, 국내 중견·중소기업 상당수는 여전히 설치 국면의 초입에서 방황하고 있다. 페레즈의 이론에서 전환점(Turning Point)은 역사적으로 금융 붕괴와 제도적 재편으로 나타났다. 오늘날 AI 버블에 대한 논의, 테크 기업들의 대규모 구조조정 소식들은 이 전환점의 신호일 수 있다.
이 뒤섞임이 현장의 혼란을 증폭시킨다. 오늘날 대부분의 AX(AI Transformation) 담론이 공허하게 느껴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에이전트 개발, 프롬프팅 최적화, 자동화 속도 향상에만 집중하는 것은 DX(Digital Transformation)의 연장일 뿐이다. 진짜 AX는 이 거대한 전환의 역사적 맥락 위에서 조직과 인간의 역할 자체를 재설계하는 것이어야 한다.
3. 조직에서 인재의 지능이 바뀌고 있다
인간에게 요구되어온 지능을 역사적으로 보면 크게 네 단계로 정리할 수 있다.
첫 번째는 산업화 지능이다. KPI, 정량적 성과, 효율의 극대화. 우리가 수십 년간 받아온 표준화된 교육 시스템이 이것을 키웠다. 높은 점수를 받고, 정해진 답을 빠르게 찾으며, 규정된 절차를 정확하게 따르는 능력이 바로 산업화 지능의 핵심이다.
두 번째는 감성 지능이다. 2000년대 이후 CX(고객 경험), UX(사용자 경험), 브랜딩의 시대가 열리면서 인간의 감정을 이해하고 연결하는 능력이 경쟁력의 원천이 되었다.
세 번째는 자기성장 지능이다. 평생학습, 자기계발, 끊임없이 자신을 업데이트하는 능력. 변화의 속도가 빨라지면서 조직이 요구하는 역량이 수시로 달라지는 환경에 적응하는 메타 능력이다.
네 번째는 존재·의미 지능이다. “나는 왜 일하는가, 어디로 가는가?”에 관한 물음과 씨름하는 능력. 삶과 일에서 의미를 발견하고, 그 의미 위에서 방향을 만들어가는 인간 고유의 역량이다.
AI는 지금 첫 번째 지능, 즉 산업화 지능을 대규모로 흡수하고 있다. S&P Global의 2025년 연구에 따르면 AI 투자의 노동시장 충격이 가장 강하게 나타나는 곳은 IT 부서의 전문화된 역할과 관리 행정 업무, 즉 산업화 지능이 가장 집중된 영역이다. 동시에 기술의 급격한 변화는 사람들을 네 번째 지능의 위기로 내몰고 있다. 일은 AI의 도움으로 빨라지고 많아졌는데 공허하다는 감각. 처리해야 할 작업의 양은 늘었지만 “내가 이 일을 왜 하는가”에 대한 답이 점점 흐릿해지는 감각. 이것이 지금 수많은 조직 구성원들이 느끼는 본질적 혼란의 정체다.
이 시대가 요구하는 인재는 결국 AI와 협력하면서 감성·자기성장·존재와 의미의 영역에서 인간 고유의 역할을 발휘할 수 있는 사람이다. AI가 산업화 지능을 점점 더 많은 비율로 점유하는 시대에, 여전히 그 영역에서 인간이 경쟁하려 한다면 결과는 비극이다. 개인도, 조직도 그렇다. 이 사실을 조직이 함께 인식하는 것, 그리고 그 인식을 노사 협의의 출발점으로 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4. 역할이 바뀐다 — 리더와 팔로워를 분류하던 시대의 종언
이제껏 조직에서 대부분의 구성원은 팔로워였다. 리더가 비전을 제시하면 다수가 그것을 실행하는 구조. 이 구조가 산업화 시대를 지탱했고, 그 시대의 효율을 만들어냈다. 그런데 AI가 조직을 슬림하게 만들면서 이제는 직급과 무관하게 모든 구성원이 리더처럼 사고해야 하는 상황이 도래하고 있다.
과거의 리더십은 변화의 속도가 느렸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명확한 방향 제시와 실행 관리로 충분했다. 그러나 AI가 만들어내는 변화의 속도와 불확실성 앞에서는 훨씬 큰 주도성과 창의성이 요구된다. 정답이 주어지고 그것을 실행하는 능력이 아니라, 정답이 없는 상황에서 방향을 만들어내는 능력이 핵심이 된다.
이를 위해 다섯 가지 역량이 필요하다고 원문은 제시한다. 탐험력, 질문력, 도감력(圖鑑力), 판단력, 그리고 적응력이다. 이 다섯 가지는 모두 산업화 지능이 아닌 인간 고유의 역량 영역에 속한다. 탐험력은 정해진 경로 밖으로 나가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는 힘이고, 질문력은 주어진 틀 자체를 의심하고 더 나은 문제를 정의하는 힘이다. 도감력은 다양한 사례와 패턴을 축적하고 그것을 상황에 적용하는 힘이며, 판단력은 불완전한 정보 속에서 방향을 선택하는 힘이고, 적응력은 변화 앞에서 무너지지 않고 새로운 컨텍스트에 자신을 재조정하는 힘이다.
이 다섯 역량은 단순히 개인의 성장 과제가 아니다. 조직이 함께 설계해야 할 역량 개발의 방향이기도 하다. 그리고 노사 협의는 바로 이 방향 설계를 함께 해야 할 공간이다.
5. 기업 구조 변화가 보내는 신호 — S&P 500이 말하는 것
LLM 등장 이후 S&P 500 기업들의 데이터는 흥미롭고도 불안하다. Morgan Stanley의 2025년 하반기 분석에 따르면, S&P 500 기업들이 AI를 전면 도입할 경우 연간 순편익이 9,200억 달러에 달할 수 있으며 이는 주로 비용 절감과 추가 매출에서 온다. 장기적으로는 S&P 500의 시가총액이 최대 16조 달러 증가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그리고 생산성 AI를 적극 활용하는 기업들은 그렇지 않은 기업 대비 주가 성장률이 약 29% 앞선다는 데이터도 확인됐다.
수익성은 오르는데 인력 규모는 줄고 있다. 이 현상은 두 가지 경로로 해석할 수 있다.
첫 번째는 효율화 경로다. 기존 사업을 유지하면서 AI를 활용해 인력을 줄이고 생산성을 높이는 방식이다. 지금 대부분의 기업이 여기에 머물고 있다. 이 경로는 단기적으로 주주 가치를 높이지만, 사회적으로는 일자리 감소와 소득 양극화를 심화시킨다. S&P Global의 2025년 연구에서는 부서장들이 AI 투자로 인해 향후 1년 내 인력 수요가 중위값 기준 7.5% 감소할 것으로 예측했다.
두 번째는 확장 경로다. AI를 활용해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고, 기존 인력을 유지 혹은 증가시키면서도 더 많은 가치를 창출하는 방식이다. 아직 이 경로로 전환한 기업은 소수에 불과하다. 그러나 진짜 변곡점은 바로 이 확장 경로를 걷는 기업들이 본격적으로 등장할 때다. AI로 새로운 시장을 열고 새 일자리를 만드는 기업. 그때가 페레즈가 말한 전개 국면, 즉 황금기 진입의 신호가 된다.
지금 노사 모두, 그리고 정부와 산업 협의체 모두, 이 전개 국면을 바라보며 준비해야 한다. 효율화에만 집중하는 설치 국면의 논리로 미래를 설계하면, 점점 줄어드는 일자리를 놓고 세대 간 갈등, 계층 간 갈등, 나아가 사회적 붕괴가 가속화될 수 있다.
6. 노사 협의의 맹점 — 진짜 어려운 질문들
다시 처음으로 돌아온다. 노사협의체는 묻는다. “무엇을 준비해야 하나요?” 이 질문에 답하기 전에 먼저 정해야 할 것이 있다.
우리 회사는 AX를 통해 사업을 확장할 것인가, 효율화할 것인가? 그 방향에 따라 구성원의 역할은 어떻게 달라지는가? 그 역할에 맞는 역량을 노사가 어떻게 함께 키울 것인가? 이 세 가지가 정리되지 않으면 노사가 마주 앉아도 서로 할 말이 없다. 협의의 형식은 있지만 협의의 내용이 없는 상태다.
현장에서 관찰되는 더 안타까운 장면도 있다. 기업은 새로운 역할을 요구하는데 구성원은 변화를 직시하지 않은 채 고용 보장만 요구하는 경우가 있다. 이것은 협의가 아니라 현실 회피다. 반대로 회사는 효율화에만 급급해 구성원이 새 역할을 배울 시간과 기회를 주지 않는 경우도 있다. 이것은 비용 절감이지 변환이 아니다. 두 경우 모두 지는 게임이다. 단기적으로 어느 한쪽이 이겨 보여도 조직 전체로서는 잃는다.
현실적으로 노사 협의 아젠다에 올라야 할 내용을 구체적으로 열거해보면 다음과 같다. AI 도입으로 변화하는 직무 기술서의 재정의, 전환 교육과 업스킬링을 위한 시간과 비용의 공동 분담 구조, AI가 대체할 수 없는 인간의 역할 영역에 대한 공동 합의, AI 도입 과정에서의 의사결정 투명성 확보, 그리고 생산성 향상으로 발생한 성과를 어떻게 나눌 것인가의 분배 설계다. 이 중 어느 하나도 단순하지 않다. 그러나 이것들이 테이블 위에 올라오지 않는 한, 노사 협의는 언제나 공허한 선언으로 끝난다.
7. 우리가 잘 아는 것과 잘 모르는 것
원문이 마지막에 지적하는 비대칭은 날카롭다. 사람들이 잘 아는 것들이 있다. AI 기술의 흐름, 프롬프팅 방법론, 주요 AI 기업들의 동향과 제품 비교. 이것들은 쉽게 검색되고 유튜브에서 강의를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정작 잘 모르는 것들이 있다. AI와 인간의 진정한 유사성과 차이점, AI를 잘 쓴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조직 내 R&R(역할과 책임)이 어떻게 재편되는지, 왜 AI 시대에 양극화가 심화되는지, 그리고 노동 이슈의 본질이 무엇인지.
이 알지 못하는 영역들은 검색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깊은 사유와 맥락적 이해가 필요하다. 테이블에 앉기 전에, 먼저 이 질문들과 마주해야 한다. 1~2시간의 자문이나 강연으로 해결될 이슈가 아니다. 이것이 “내 책을 먼저 읽고 오시라”는 요청의 진의다. 읽고 온 사람과는 훨씬 깊은 데서 출발할 수 있다는 경험적 발견이기도 하다.
결론 — 반갑고 걱정되는 이유
이 모든 것이 “AI 도입하면 뭘 준비해야 하나요?”라는 단 하나의 질문에 담겨 있다. 반가운 이유는 그 질문이 나왔다는 것, 두려움이 아닌 준비의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걱정되는 이유는 그 질문이 생각보다 훨씬 크고 복잡한 맥락을 담고 있으며, 빠른 답을 구하려는 충동이 오히려 더 큰 길을 놓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당장 답을 찾으려 하지 말고, 먼저 어떤 질문을 해야 하는지부터 같이 정리해야 한다. 질문의 틀을 다시 세우는 것, 그게 시작이고, 사실 그게 제일 어렵다. 그리고 그 어려운 시작을 기꺼이 하는 노사가 결국 다음 시대를 함께 통과할 수 있다.
카를로타 페레즈의 이론이 옳다면, 지금 우리는 혼돈의 설치 국면에 있다. 황금기로 가는 전환점은 기술이 아니라 제도와 합의에서 만들어진다. 그리고 그 합의의 가장 작은 단위가 지금 노사협의체 테이블 위에서 시작되고 있다.
작성일: 2026-03-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