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시대에 달라져야 할 기획자·디자이너의 보법
「Product Makers Note」 4호 — 상세 해설 및 분석
원문 출처: Product Makers Note (판교에서 여의도까지)
원문 발행일: 2026년 3월 4일
원문 링크: https://maily.so/makersnote/posts/8do7kj9drgq
태그: #AI기획자 #생성형AI #AI디자인 #AI기획
들어가며 — 이 글은 왜 쓰였는가
이 글은 10년 이상 다양한 IT 서비스 도메인에서 기획자로 일해온 필자 ‘사샤’가, 생성형 AI 서비스 기획을 처음 시도하면서 겪은 실제 시행착오들을 솔직하게 풀어낸 회고이자 실무 가이드다. 단순한 조언 모음집이 아니라, 현직 기획자가 현장에서 직접 “깨지면서” 발견한 통찰들이라는 점에서 특별한 무게감을 갖는다.
필자는 AI 업계로 넘어온 이후 수년간 쌓아온 기획 역량이 하루아침에 무용지물이 된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그 당황스러움이 사실은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었음을, 함께 이야기할 동료조차 없었기에 더욱 혼란스러웠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 경험을 바탕으로, 같은 혼란을 홀로 감당하고 있을 다른 기획자·디자이너들을 위해 이 기록을 공유한다.
1부 — 10년 차 기획자의 설계서가 쓰레기통으로 간 날
사건의 발단: 50페이지짜리 완벽한 설계서
필자가 처음으로 AI 서비스 기획을 맡았을 때, 그는 자신이 가장 잘 아는 방식으로 일했다. 예외 케이스 하나하나까지 촘촘히 막아낸 50페이지 분량의 화면 설계서를 완성했고, 개발팀 리뷰도 완벽하게 마쳤다. 오랜 경력에서 나오는 자신감 속에서 “이렇게 진행하면 될까요?”라는 확인을 막 던지려던 순간, 내내 심드렁한 표정을 짓고 있던 개발자가 이렇게 말했다.
“사샤, 이건 생성형이라… 기획서처럼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어요.”
필자가 “안 될 수도 있다는 게 무슨 말이냐, 기획서대로 안 나오면 버그 아니냐”고 되물었을 때, 개발자의 대답은 단 두 글자였다.
“아니요, 확률이에요.”
충격의 본질: ‘확정의 언어’와 ‘확률의 언어’ 사이의 충돌
이 짧은 대화 속에는 사실 매우 깊은 패러다임의 충돌이 담겨 있다. 전통적인 소프트웨어 기획에서 기획자의 역할은 이른바 결정론적 세계(Deterministic World) 를 설계하는 것이었다. 버튼 A를 누르면 반드시 결과 B가 나온다. 모든 예외 상황에는 미리 정의된 처리 로직이 존재하고, 그것을 벗어나는 동작은 곧 ‘버그’다. 스펙은 곧 계약이고, 기획자는 그 계약서를 정밀하게 쓰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생성형 AI는 그 전제 자체를 뒤집는다. 동일한 프롬프트를 입력해도 10분 전 응답과 지금의 응답이 다를 수 있다. A를 넣었을 때 B가 아닌 C가 나올 수도 있고, 때로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을 수도 있다. 이것은 버그가 아니라 확률적 시스템의 본질적 특성이다. ChatGPT나 Claude 같은 LLM(대규모 언어 모델)은 정답을 출력하는 기계가 아니라, 주어진 맥락에서 가장 그럴듯한 텍스트를 확률적으로 생성하는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이 사실을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기획서에 어떻게 반영해야 하는지를 몰랐다고 솔직하게 고백한다. 결국 그의 50페이지짜리 설계서는 “화면만 예쁘게 그려놓은 껍데기”에 불과했고, AI 결과물을 전혀 통제하지 못하는 문서였다. 10년의 기획 경력이 하루아침에 ‘구식’이 된 순간이었다.
2부 — 예쁜 디자인이 AI를 만나면 ‘바보’가 되는 이유
아름다운 시안의 몰락
두 번째 에피소드는 디자인 분야에서의 충격이다. 어느 날 디자이너가 정교하고 아름다운 UI 시안을 가져왔다. 레이아웃은 사용자 동선에 맞게 짜여져 있었고, 이미지와 텍스트의 배치는 완벽했으며, 각 필드에는 딱 맞는 정보가 들어오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이건 무조건 된다’는 확신이 들 만큼 완성도 높은 시안이었다.
그러나 개발자의 반응은 냉담했다.
“이 디자인, 생성형 LLM의 장점을 활용하는 디자인이 전혀 아닌데요, 오히려 반대예요. 데이터가 안 나올 수도 있고, 너무 길게 나올 수도 있고, 아예 엉뚱한 소리를 할 수도 있어요. 이 레이아웃은 다 깨질 겁니다.”
필자는 빠른 성과에 대한 조급함과 디자인에 대한 애정 때문에 “프롬프트를 잘 짜면 되지 않겠냐”며 일단 시도해보자고 밀어붙였다.
현실과의 충돌: 할루시네이션의 등장
다음 날 실제 AI 결과값을 UI에 띄웠을 때 벌어진 일은 충격적이었다. 다섯 글자만 들어와야 할 자리에 AI는 “죄송합니다, 저는 언어 모델로서…”라는 장문의 거절 메시지를 쏟아내며 레이아웃을 완전히 무너뜨렸다. 날씨 정보가 나와야 할 칸에는 “내일은 당신의 마음도 맑음입니다”라는 맥락 없는 감성 문구가 등장했다. 정교하게 계산된 콘텐츠 영역에는 전혀 관계없는 데이터가 흘러들어왔다.
이것이 바로 할루시네이션(Hallucination) 이다. LLM은 사실이 아닌 내용을 그럴듯하게 생성하거나, 요청된 형식을 무시하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응답하는 경향이 있다. 아무리 잘 만든 디자인 시안도, AI가 생성하는 예측 불가능한 결과물 앞에서는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을 필자는 이 경험을 통해 몸으로 배웠다.
3부 — 그래서 기획자와 디자이너는 어떻게 달라져야 하는가
두 번의 충격적인 실패 이후, 필자는 수십 번 프롬프트를 갈아엎고, 의도적으로 결과를 망가뜨려보는 실험을 반복하며 AI 시대에 맞는 사고방식을 체득해나갔다. 그 과정에서 도달한 핵심 통찰은 단순하지만 강력하다.
AI 시대의 기획자와 디자이너는 ‘화면을 그리는 사람’이 아니라, ‘불확실성을 설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 깨달음을 바탕으로, 필자는 실무에서 반드시 바뀌어야 할 세 가지 ‘보법(步法)’, 즉 일하는 방식과 사고의 이동 패턴을 제시한다.
레슨 1 — 스펙을 정의하지 말고, 가이드를 설계하라
기존 방식의 문제
전통적인 기획에서 기획자는 완벽한 사양서(Specification)를 만드는 사람이었다. “이 버튼을 누르면 이 문구가 나와야 한다”, “예외 상황 X에서는 Y라는 메시지를 표시해야 한다”는 식으로, 모든 경우의 수를 미리 정의하고 그것을 철저히 고수하는 것이 역할이었다. 하지만 AI는 생물처럼 예측 불가능하다. 아무리 빈틈없는 스펙을 써도, AI는 기획자의 의도를 벗어난 C나 D를 내놓을 수 있다.
새로운 접근: AI의 ‘허용 범위’를 설계하기
필자가 제안하는 전환은 이렇다. 결과를 고정하는 대신, AI가 움직일 수 있는 경계선을 설계하라. 출력 결과의 형식은 어디까지 허용할 것인지, 톤과 어조는 어느 선을 넘어서는 안 되는지, 텍스트 길이는 어떻게 제어할 것인지를 기획의 핵심 요소로 삼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프롬프트 설계’다. 그런데 프롬프트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프롬프트 + 비즈니스 로직의 결합
필자는 완벽한 프롬프트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반드시 비즈니스 로직이라는 안전장치를 추가로 설계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예를 들어, AI의 답변 근거가 불충분할 때는 자동으로 “참고용” 레이블을 달고, 프롬프트를 무시하고 20자 이상의 응답이 와도 화면에서는 말줄임표(…)로 처리하는 것처럼 AI의 돌발 행동을 흡수하는 로직이 필요하다.
프롬프트는 방향을 잡는 핸들이고, 비즈니스 로직은 사고를 방지하는 안전벨트다. 둘 중 하나만으로는 반드시 한쪽이 무너진다. 기획자는 이 두 가지를 함께 설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레슨 2 — ‘해피 패스’가 아닌 ‘최악의 시나리오’에서 디자인을 시작하라
디자인 시안의 치명적 함정
기존의 디자인 프로세스는 언제나 ‘해피 패스(Happy Path)’에서 출발한다. 데이터는 항상 적당히 예쁜 길이를 유지하고, 텍스트는 딱 맞게 들어오며, 이미지는 정확한 자리를 차지한다. 하지만 실제 LLM이 생성하는 데이터는 그렇지 않다. 길고, 지저분하며, 때로는 완전히 엉뚱한 내용이 나온다.
새로운 프로세스: 먼저 날것의 결과물을 보라
필자는 이 경험 이후 디자인 시안에서 출발하는 방식을 완전히 바꿨다. 최소한의 요구사항만 정의한 뒤 빠르게 AI 결과물을 실제로 뽑아보고, 그 ‘날것의 결과’를 디자이너와 함께 공유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이렇게 하면 대화의 중심이 자연스럽게 바뀐다. “이 화면이 예쁜가?”가 아니라, “이 예측 불가능한 데이터를 어떻게 안정적으로 담을 것인가?”로.
폴백 디자인(Fallback Design)의 중요성
AI 시대의 진짜 디자인 실력은 폴백 디자인(Fallback Design), 즉 예외 상황에서의 우아한 대응을 먼저 고민하는 능력이다. 데이터가 아예 오지 않았을 때, 엉뚱한 답변이 날아왔을 때, 텍스트가 너무 길어 레이아웃을 뚫고 나올 때 — 이 상황들을 사전에 설계하는 것이 핵심이다. 이제 디자인은 정해진 형식에 맞는 데이터를 담는 ‘틀(Mold)’이 아니라, 어떤 모양의 데이터도 유연하게 받아낼 수 있는 ‘그릇(Container)’ 이 되어야 한다.
레슨 3 — 완벽한 정답보다, 유저가 운전할 수 있는 ‘조종석’을 설계하라
자판기 모델의 한계
기존의 서비스 기획은 ‘자판기 모델’에 가까웠다. 사용자가 버튼을 누르면 정답이 튀어나오고, 기획자는 그 정답을 완벽하게 설계하는 것이 목표였다. 하지만 AI 시대에서는 이 모델이 근본적으로 실패한다. AI가 아무리 발전해도 사용자의 의도를 단 한 번에 100%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패러다임: 공동 창작의 인터페이스
필자가 제안하는 대안은 사용자가 AI 결과물을 직접 다듬어갈 수 있는 인터페이스를 기본으로 설계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결과물의 톤을 변경하는 옵션, 여러 버전을 나란히 비교하는 기능, 특정 문장만 선택해 다시 생성하는 기능 등이 해당된다. 한 번에 완벽한 정답을 내놓으려 하지 않고, 사용자와 AI가 함께 결과물을 만들어가는 방식이다.
인간 중심 AI(Human-Centered AI)의 핵심
이 접근법의 핵심은 사용자의 멘탈 모델을 바꾸는 것이다. 사용자가 서비스를 ‘오류 없는 검색 엔진’으로 오해하게 두면 기대가 어긋날 때마다 실망하고 이탈한다. 반면, ‘내 의도를 함께 다듬어가는 AI 파트너’라는 멘탈 모델을 갖게 하면 사용자는 결과가 완벽하지 않아도 “내가 의도를 이렇게 보정하면 더 좋은 답이 나오겠구나”라고 생각하며 주도적으로 서비스를 이용하게 된다.
필자는 이것이 글로벌 AI PM들이 말하는 인간 중심 AI(Human-Centered AI) 기획의 본질일 수 있다고 말한다. 기획자가 모든 결과를 통제하려는 강박에서 벗어나, 사용자가 AI의 확률적 흐름에 능동적으로 개입할 수 있도록 제어 장치와 피드백 루프를 UI/UX 곳곳에 배치하는 것 — 그것이 AI 시대의 진짜 기획이다.
4부 — 그래서 우리는 여전히 유효하다
구력은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방향을 잃었을 뿐
글의 마지막에서 필자는 중요한 위로와 통찰을 전한다. 10년의 경력이 무의미해진 것이 아니었다. 다만, ‘확정의 시대(Deterministic Era)’에 최적화된 사고방식이 ‘확률의 시대(Probabilistic Era)’로 넘어오며 일시적으로 길을 잃었을 뿐이다.
AI는 기획자와 디자이너를 무력화하는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우리에게 더 유연해질 것을 요구하는 동료에 가깝다. 스펙을 고집하던 손을 조금 풀고, 불확실성을 설계하는 법을 배우고, 유저에게 조종석을 건네는 순간 — 기획자와 디자이너는 다시 강력해진다.
핵심 개념 정리
| 개념 | 설명 |
|---|---|
| 확률의 문법 | 생성형 AI는 동일한 입력에도 다른 결과를 낼 수 있는 확률적 시스템이다 |
| 할루시네이션(Hallucination) | AI가 사실이 아니거나 맥락에 맞지 않는 내용을 그럴듯하게 생성하는 현상 |
| 해피 패스(Happy Path) | 모든 데이터가 이상적으로 작동할 때를 전제로 한 설계. AI 서비스에서는 현실과 괴리됨 |
| 폴백 디자인(Fallback Design) | 예외 상황, 오류, 예측 불가능한 결과에 우아하게 대응하는 UI/UX 설계 |
| 비즈니스 로직 안전장치 | 프롬프트를 벗어난 AI 결과물을 흡수·처리하는 코드 레벨의 규칙 |
| 인간 중심 AI(Human-Centered AI) | 사용자가 AI 결과에 능동적으로 개입하고 방향을 조정할 수 있도록 설계하는 접근법 |
세 가지 레슨의 요약
① 스펙 → 가이드
“이렇게 되어야 한다”는 결과 고정에서 벗어나, AI가 넘지 말아야 할 경계선을 설계하고 프롬프트와 비즈니스 로직을 함께 설계하라.
② 해피 패스 → 최악의 시나리오
아름다운 시안에서 출발하는 관성을 버리고, 실제 AI 결과물을 먼저 뽑아 그것을 기반으로 폴백 디자인을 설계하라. 디자인은 틀이 아니라 유연한 그릇이어야 한다.
③ 자판기 → 조종석
한 번에 완벽한 정답을 내놓으려 하지 말고, 사용자가 AI 결과물을 직접 다듬고 개입할 수 있는 인터페이스를 기본으로 설계하라. 사용자를 결과의 수용자가 아닌 공동 창작자로 만들어라.
마치며 — 이 글이 주는 의미
이 글은 단순히 “AI 시대에는 이렇게 해야 한다”는 처방전이 아니다. 오랜 경력의 전문가가 새로운 패러다임 앞에서 당황하고 실패하면서 얻어낸 진짜 통찰이기에 더 가치 있다. AI 기획이나 AI 서비스 디자인을 시작하려는 사람, 혹은 이미 시작했지만 비슷한 혼란을 겪고 있는 사람이라면 — 이 세 가지 보법의 전환이 든든한 출발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문서는 「Product Makers Note」 4호 원문을 바탕으로 작성된 상세 해설 및 분석 문서입니다.